비버 집을 부수다

벌써 몇 달 사이에 세 번의 블로그를 만들게 되었다. 앞의 두 블로그는 나름의 기구한 사연이 있게 되어 쓰지 않는다. 있던 글도 갈아엎었다. 비버 집을 계속 부수는 것과 비슷한데, 동물원에서는 비버가 나무를 옮겨 열심히 집을 지어놓고나면 사육사가 그걸 도로 부순다고 한다1. 비버가 또 다시 집을 짓게 해서 몸을 움직도록 하려는 이유에서다. 나도 비버와 사육사처럼 열심히 가꾸어놓은 블로그를 만들었다 허무는 짓을 반복하고 있다.

이전까지 동작하던 블로그는 작년 쯤 만들었는데, 글을 그닥 많이 쓰지는 못했다. 쓸 만한 글이 없었던 것이다. 글이래야 항상 쓰면 써지는 것이겠지만 어느정도 길게 풀어쓸만큼의 글을 쓰지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은 글에 대한 강박이 있기보다는, ‘레시피’를 적고싶지 않은 마음이었다. 유튜브에서 짐 켈러를 검색하면 나오는 영상 중에 ‘일류와 이류의 차이’라는 영상이 있는데 나는 그 영상을 좋아한다. 빵을 만든다고 했을 때, 이류는 빵 만드는 레시피를 따르기만 한다. 반대로 일류는 어떻게 하면 빵이 부풀거나 딱딱해지는 지 알고 빵의 본질을 알고 빵을 만든다. 어떤 개념을 답습하는 것도 학습은 되겠지만, 블로그에서 만큼은 조금이라도 새로운 내용을 적어보고 싶었다. 레시피를 따라쓰는 정도의 글은 별로 적고싶지 않았다.

이번에는 조금 힘을 빼고 글을 써볼까 한다. 조그마한 통찰과 개발적인 내용을 구분없이 적어보고 싶다. 지금까지는 개발이라는 실용적인 분야에 사고가 갇혀있었던게 아닌가 싶어서다. 구체적이고 전문적인 글도 좋지만 추상적이고 가벼운 글을 많이 쓸 예정이다. 대신에 레시피보다는 본질적인 것들을 적고 싶다. 갈아엎은 글들은 그러한 관점에서 보자면 별로 아깝지는 않았다.

블로그도 조금 더 본질적인 방향으로 만드려고 고민했다. 필요없거나 잘 동작하지 않는 것들은 빼고 필요한 것만 추려서 남겼다. Astro2라는 프레임워크로 작업했는데, 대략 2 - 300줄의 코드만 적고도 만족스러운 정도로 만들 수 있었다. 최근에 폴 그레이엄의 ‘해커와 화가’를 읽었는데, 좋은 개발 언어가 무엇인가에 대한 얘기를 한다. 그 중 하나는 적게 쓰고 많은 일을 하는 언어인데, Astro로 작업하면서 비슷한 경험을 하는 것 같다.

사실 중간에 만들다 만 블로그도 있다. 작년 말 쯤에 갑자기 독특한 정체성을 가진 블로그를 만들고싶다는 생각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다 레트로에 꽂혀 윈도우98을 테마로 한 블로그로 조금씩 발전해나갔는데, 윈도우 창처럼 움직이는 창과 진짜 배경화면 같은 내비게이션 바, 상태표시줄 같은 요소들이 잔뜩 들어갔다. Astro와 Solid.js를 처음 써봤던지라, 신나게 작업했다.

my-second-blogWindow98 스타일로 만들어보려 했던 블로그

그렇게 신나게 작업하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뭘 만들고 있는 거지?‘. 너무 딴 길로 샌 나머지, 내가 원래 가려던 길과 너무 멀어져버렸었다. 사실 전달하고 싶었던 건 생각이고 글이었는데, 글을 담는 그릇만 너무 화려하게 장식하는 꼴인 것 같았다. 그 생각이 들자마자 개발을 멈췄다.

새로운 걸 만들고 그걸 부수는 건 조금 슬프지만 나름 괜찮은 일이다. 비버에게는 다시 움직일 동력이 되고 나에게는 또 다시 만들고 싶은 힘이 된다. 다음에 만들 때는 이전에 만들었던 것을 참고해서 만들지 않을 수가 없다. 오히려 어서 더 멋있는 것을 만들고 싶어져 안달나게 되어버린다. 나는 또 어디선가 재미난 나뭇가지를 주워다가 새로운 집을 만들게 될 지도 모른다.

Footnotes

  1. https://www.youtube.com/watch?v=nLYCoMMgS_k

  2. https://astro.buil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