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벼운 무료함과 파괴적 만족감
걷는 것을 좋아한다. 나는 보통 재택 근무를 많이 하는데, 아침에는 꼭 주변 공원에서 걷는다. 별 일이 없는 주말에는 밖에 나가 걷는 걸 좋아한다. 지난 주에는 제주도에서 배낭을 매고 걷다왔다. 걷는 행위는 가장 단순한 형태의 능동적인 활동이 아닐까 싶다. 걸음마다 내가 어떻게 움직일 지 생각하고 걷지는 않는다. 걸을 때만큼은 별 생각을 하지 않아도 된다.
적당한 무료함에서 나오는 가벼운 행복감을 좋아한다. 조금 심심하긴 하지만 그럴 수록 오히려 머리가 맑아지는 기분이다. 몸으로 따지면 기분 좋은 공복 상태와 같은 것이다. 주변이 고요해지면 의외로 이런저런 생각도 잘 나게 된다. 조금씩 글을 쓰기 시작했던 이유도 이런 잡생각들을 마냥 흘려보내기가 아까운 이유도 있다.
반면에 파괴적인 만족감을 느낄 때도 있다. 무언가에 지나치게 빠져들게되면 오히려 생각의 폭이 좁아지고 무거운 기분이 든다. 이런 저런 개발 관련 사이트들과 블로그들, 많은 트윗을 보다보면 오히려 머릿속이 더 복잡해지게 된다. 쇼츠와 틱톡도 그래서 나와 안맞았다. 언젠가부터 그런 일들을 파괴적인 만족감을 주는 일들로 규정해왔다. 짧은 기간동안 너무 많은 정보를 주입받게 되는 경우가 그렇다. 불량한 음식을 빠르게 먹다보면 배가 더부룩해 기분이 안좋아지는 것과 비슷하다.
언제나 그래왔고, 그리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지만 세상은 점점 파괴적 만족감을 주는 일들로 가득차고 있다. 적당한 추천 알고리즘과 자극적인 소재들이 만나서 사람들의 머릿속을 지속적으로 괴롭힌다.
문제는 디지털 세상의 만족감은 현실 세계의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정크푸드와 같은 것이라는 점이다. 디지털 세상에서 느끼는 대화와 기쁨, 웃음과 귀여움은 모두 현실의 것을 이기지 못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삶이 재미있는 것으로 가득 찰수록 재미가 없어진다. 일상 속의 공허함과 무료함이 줄어들수록 삶이 풍만해지지 못한다.
뭐 그렇다고 당장 카카오톡과 유튜브, 인스타그램 같은 것들을 지우고 살 수는 없지 않을까. 쏟아지는 자극적인 물결에서 내가 별로 할 수 있는 건 없고 그저 걷는 것 밖에 없는 것 같다. 대충 차려입고 나가 공원에서 강아지들끼리 싸우는 모습이나, 아침 일찍 제초하시고 공원을 쓸어내는 분들을 보면서 딴 생각이나 잠깐 하고 오는 게 내 최선이다.